감상적으로 분단을 소비하기
우리에게는 <쉬리>가 있다. 또 <태극기 휘날리며>가 있고, <공동경비구역 JSA>가 있다. 분단의 현실을 비극적인 사랑과 형제의 엇갈린 운명이나 남자들 사이의 우정의 문제와 더불어 다루어낸 작품들 말이다. 간혹 <간첩 리철진>이나 <웰컴 투 동막골>처럼 재기발랄한 영화들이 없었던 것 아니지만, 한국영화가 분단을 소비하는 방식은 대개 지극히 감상적인 멜로드라마의 틀을 빌어온 소위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양식을 통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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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보아 <의형제>도 <쉬리>의 뒤를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남파간첩 송지원(강동원)은 당의 지령을 받고 ‘그림자’와 접선한다. 그들이 맡은 임무는 귀순한 김정일의 육촌을 살해하는 일이다. 이 사건의 국정원 책임자인 한규(송강호)는 간첩검거 작전에 실패한 뒤 징계를 받는다. 한편 지원 역시 이 일을 끝으로 당에서 버림받고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된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였던 둘은 모두 ‘쫓겨난 자’가 되어 6년 뒤 우연히 재회한다. 그리고 사장님과 직원으로 함께 일하면서 마침내 서로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간첩 ‘그림자’의 입을 통해 영화 스스로 자주 언급하듯이(“남조선 xx들, 감상적이어서리...”) <의형제>는 분단을 다룬 이전의 한국영화들처럼 내놓고 ‘감상적인’ 영화다. 분단을 소재로 하되 이야기의 중심은 전혀 다른 환경의 두 남자가 앙숙으로 만나 어떻게 서로 닮아가고 의지하게 되는지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객들은 두 남자의 감정변화와 심리를 따라가도록 섬세하게 유도된다.
(의)형제는 영리했다
사실 이 영화에는 최근 한국영화의 흥행코드들이 총동원되어 있다. 가족, 분단의 비극, (남북관계에 대한 은유로서의) 형제애, 최근에 더 강력해진 폭력 이미지와 추격신, 연기 잘하는 중견 배우와 연기파로 진화중인 꽃미남 배우의 출연, 비판적인 사회의식, 웃음과 동시에 감동을 주는 전략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 중 어느 것도 거부감을 줄 만큼 ‘튀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이러한 요소들이 영화의 중심주제인 두 인물의 관계를 중심으로 수렴하고 발산하면서 영화의 재미를 더한다. 그것은 사람을 웃기고 울리는 데 능한 걸출한 배우 송강호의 공이기도 하고 감독의 치밀한 연출력과 시나리오의 힘이기도 하다. 하여 우리는 이 영화를 두 남자의 감동적인 우정과 가족애를 다룬 한 편의 드라마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의형제>는 대중의 언어로 말하는 법을 알고 있고, 그런 점에서 참 잘 만들어진 영리한 영화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영화 읽기를 여기서 멈춘다면 이 영화의 절반만을 즐기는 셈이 될 거라고 나는 믿는다. <의형제>에 대한 평가 역시 영리한 영화 대신 -흥행을 염두에 둔- 영악한 영화라는 평가가 더 어울리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의 현재를 보다
<의형제>의 영리함은 오히려 다른 지점에서 더 빛이 난다. 이 영화는 동시대의 정서와 관점을 읽어내는 기민함과 나름의 성실함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영화는 이 시대의 젊은 관객들에게 있어서 더 이상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분단 상황과 이념의 문제가 모든 비극의 뿌리라고 섣불리 말하지 않는다. 더불어 영화는 사건이나 인물들의 행동이 형제애나 우정이나 가족들을 위한 희생이거나 그도 아니면 자주국방과 같은 ‘대의명분’으로서의 한 두 가지 동기에 기인하는 것은 아닐 거라고,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성실하게 학습하고 연구한 결과를 덧붙여 이야기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의형제>는 <쉬리>나 <태극기 휘날리며>같은 이전의 작품들에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 곧 <추격자>나 봉준호의 영화들과 같이 한국사회의 폐부를 예리하게 파고든 최근의 수작들의 뒤를 잇는다.
한규가 국정원에서 구조조정 대상이 된 것에 대한 설명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것은 단순히 작전실패에만 원인이 있지 않았다. 사실은 김대중 정부의 남북화해 분위기와 인원감축 대상 1순위(이혼으로 부양가족 없음)라는 정치경제적 환경상의 이유와도 관계가 있다고, 영화는 살짝 흘린다. 상관인 국정원 차장에게 한규는 말한다. “에이, 짜르는 이유가 IMF 때문이야, 이혼 때문이야, 작전실패 때문이야? 하나만 해야지 하나만.” 범죄나 공권력이 등장하는 영화들에서 흔히 주인공의 비리나 거친 성격 같은 개인적인 문제를 사건의 원인이자 발단으로 삼는 것과 차별되어 보이는 설정이다.
분단과 가족문제를 보는 관점도 그렇다. 한규와 지원은 둘 다 가족과 헤어져 산다. 어린 딸 하나가 있는 점도 같다. 지원이야 분단 상황 때문에 가족이 북에 있어 만날 수 없다지만 한규는? 이혼 후 영국인과 재혼한 아내가 딸과 함께 영국에 살고 있어 몇 년 째 못 만나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은유다. 분단을 소재로 했지만 <의형제>는 분단된 현실 말고도 이 나라에 이와 유사한 단절과 해결해야 할 무수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말하자면 영화는 대한민국의 ‘과거’가 아니라 ‘오늘’에 주목한다.
현실문제의 ‘자연스러운’ 노출이 던지는 질문들
중요한 것은 분단의 문제를 다룬 많은 영화들이 ‘피해자 정서’에 기대고 있는 데 반해, 이 영화가 시선을 두고 있는 아픔은 주로 한국사회가 가해자의 위치에서 품어내고 책임져야 할 현실의 문제들이라는 점이다. 한규가 ‘그림자’를 추격하는 장면에서 그들이 오토바이와 자동차로 훑고 지나가는 곳은 ‘뉴타운 건설’을 앞둔 재개발지구의 주택가와 빈민가이다. 그리고 두 남자가 6년 만에 재회하는 폐기물처리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베트남 이주 노동자들이다. 한규의 회사 ‘인터내셔널 테스크포스’가 집나간 이주 혼인여성들을 찾는 일인 것과 냉정한 한규에 비해 지원의 ‘인간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대표적인 예가 그녀들을 대하는 부드러운 태도라는 점 등에도 주목할 만하다. 뿐만 아니라 북에 두고 온 지원의 가족과 동료의 에피소드는 탈북 ‘새터민’들이나 귀순자의 문제와 시시때때로 급변하는 대북정책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물론 영리한 대중영화 <의형제>는 이 중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집요하게 파고들지는 않는다. 단지 한규와 지원을 둘러싼 영화의 중심 사건들을 동시대의 현실과 분리시키지 않고 꼭 적당한 곳에 배치해 놓았을 뿐이다. 영화는 우리가 저녁뉴스에서 무심코 듣거나 작심하고 다큐멘터리들을 찾아 보지 않는 한, 쉬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굳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현실의 문제들을 즐겨 보고 듣고 싶은 이야기들과 교묘하게 섞어놓는 전략을 택한 셈이다. 그러니 마치 간첩의 암호를 해독해내듯 텍스트 속의 크고 작은 사인들을 읽어내는 것은 오롯이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기꺼이 그 일을 즐겨할 때 이 영화의 매력이 우리에게 더 크고 가깝게 다가올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글/최은
청어람 문예 아카데미/중앙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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