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일
지난 2월 3일 우리나라의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산부인과 병원 세 곳을 불법 낙태 혐의로 고발하면서 그 동안 대중적 무관심 속에 잠잠하던 낙태 문제가 새롭게 사회적으로 이슈화되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데 주력하던 캠페인 방식에 한계를 느낀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낙태를 불법적으로 시술하는 병원을 직접 고발함으로써 문제를 이슈화하고 실질적인 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 법적 대응 방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이번 행동은 적어도 현재까지는 적지 않은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사회의 낙태 판단의 근거: 사회적 합의 수준도 성경적 기준도 아닌 '현실'
낙태에 관한 우리나라의 사회적 합의 수준을 살펴보기 위해 현행법을 살펴보자. PD수첩 2월 16일 방송에 따르면, 합법적 낙태는 임신 24주 이내로 제한되며 성폭행․근친상간․산모 건강 위협․유전성 질환(정신질환․혈우병․간질)․전염성 질환(에이즈․간염 등) 등의 조건일 때만 허용된다. 그러나 2005년 보건복지가족부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미혼여성의 총 임신건수 150,467건 중 95.7%가 낙태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또, 병원에서는 법적 제한 기준과 달리 임신 24주 이상의 경우에도 낙태를 공공연하게 시술하고 있다. 현실에서는 낙태에 관한 기독교적 기준은커녕 합법적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무차별적 낙태 시술이 성행하고 있는 셈이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더 큰 어려움은 교회 내부의 상황도 실제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낙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각자 다양하겠지만, 암암리에 낙태를 선택한 사람들을 우리는 주위에서 흔치 않게 접할 수 있다. 또 신자유주의적 생존 경쟁에 내몰린 교회들은 교인 수의 확보와 유지라는 ‘자기 보존’의 가치를 교회의 목적으로 삼으면서 교인들이 상처를 받아 자신의 교회를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 더 이상 낙태에 대한 성경적 입장을 분명하게 가르치지 않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인들과 동일하게 임신과 낙태의 문제에 대해 판단할 때 성경이 아닌 ‘현실’이라는 세상 정신에서 그 근거를 가져오고 있으며 이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현대의 세속화 논제에 따르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과학혁명과 자본주의적 산업화라는 계기를 통해 출현한 현대 사회에서 종교적 신앙은 더 이상 사회의 공적 이슈에 대해 객관적 기준을 제시할 수 없게 되었으며, 개인의 종교적 감정을 만족시키기 위한 사적이고 내면적인 영역에서만 그 정당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현대의 복음주의 교회 또한 이와 같은 세속화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고, 따라서 기독교인 또한 자신의 내밀한 종교적 심성을 만족시켜 주는 데에만 자신의 신앙을 연관 짓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앙은 역사적이고 정통적 기독교의 맥락에서 볼 때 절대로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은 개인과 사회의 공적 이슈를 포함하는 모든 문제에 대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있으며, 그에 따른 복종을 철저히 요구한다. 따라서 낙태와 같은 개인적이고 또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기독교 신앙은 공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한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 ‘행복한 삶’의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보장 여부에 따라 좌우되는가?
주로 가부장적 남성 사회에서 벌어져왔던 여성 착취라는 문제의식의 맥락에 있는 낙태 찬성론자들의 주장은 낙태의 정당성을 산모인 여성의 권리와 행복할 권리의 차원에서 다룬다. 미혼모라든지 성폭행을 당한 여성, 질병이나 장애의 가능성이 높은 아이, 출산 이후 정상적인 양육의 현실적 어려움 등으로 인해 태어날 아이와 산모인 여성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의 ‘행복 추구권’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현재의 사회적 조건 속에서 정상적으로 행복한 삶을 누릴 가능성이 희박하다면 낙태를 선택할 수 있는 산모의 권리가 존중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낙태찬성론자들의 주장에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의 기준이 ‘행복한 삶’의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보장 여부에 따라 판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하나님의 신적 본성 중 하나인 인격성을 부여받아 창조된 존재라는 사실을 통해 말하고 있다(창1:27). 포스트모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현대적 사유와 달리 성경은 ‘본질적으로’ 인간 생명은 다른 모든 존재들과는 차원이 다른 근본적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신적 명령이 없이 인간이 다른 인간을 임의로 살해하는 것은 성경에서 명백하고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십계명의 제6계명 참조). 또, 성경은 출산 이전의 태아가 이미 ‘인간’이라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시편 139편 등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 생명의 창조를 주권적으로 시행하시며, 이는 창조 이전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던 일의 실행이고, 인격적 본성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나’라는 존재의 시작이 ‘출산 이후’가 아닌 ‘어머니 자궁 속’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수정 이후 14일, 또는 우리나라의 임신 이후 24주 등의 기준은 낙태와 관련된 현실적 조건과 사회적 합의에 따른 법적 기준일지는 모르지만,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 어떠한 의미에서도 본질적 기준으로는 작동할 수 없는 임의적이고 일시적인 기준일 뿐이다. 예를 들어, 수정 이후 14일, 임신 이후 24주라는 기준을 생각해 보자면, 13일된 태아와 15일된 태아, 23주된 태아와 25주된 태아가 과연 어떠한 본질적 차이를 갖고 있는가? 15일된 태아를 죽이는 것이 살인인데, 13일된 태아가 살인이 아닐 수 있는가? 25주된 태아를 낙태하는 것이 살인이라면, 23주된 태아를 죽이는 것은 살인이 아닌가? 출산 직후의 아이를 죽이는 것이 살인이라면, 출산 직전의 아이를 죽이는 것은 살인이 아닌가? 정자와 난자의 수정이라는 시점 이외에 생명의 본질적 존엄성을 명백하게 구별해 줄 수 있는 시점은 없다.
장애나 질병, 경제적 여건 등 어떠한 인간적․사회적 조건들도 낙태를 정당화할 수 없다. 산모와 아이의 ‘행복’은 근본적으로 어떠한 인간적․사회적 조건들에 의해 ‘결정’되어 있지 않다. 또, 그 ‘행복’은 본질적 차원에서 공리주의적 방식으로 측정될 수도 없다. 성경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결정론과 공리주의적 차원에서 판단하는 것을 거부한다.
실제로 장애나 질병을 갖고 태어나는 아이나 산모 가정의 경제적 여건의 제약으로 인한 불행이란, 그 아이나 산모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 아이나 산모가 살고 있는 사회가 구성해 놓은 차별적 조건으로 인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낙태에 대한 사회적 허용을 통해 불행을 느낄 태아의 생명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사회적 조건들에 대한 적극적 저항과 개혁에 나서야 하는 것이다. 낙태의 사회적 허용이라는 해결 방향은 가해자(사회)가 아닌 피해자(태아)에게 짐을 떠넘겨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비열한 태도일 뿐이다. 또한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논리로 낙태를 정당화한다면, 우리는 동일한 논리로 장애인, 힘없는 노인과 영아들, 안락사와 열등한 능력을 지닌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 또한 정당화할 수밖에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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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적인 사회적 조건의 개혁'과 '무력감 속에서 이뤄진 선택'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낙태의 허용이 산모의 생명에 대한 위협이라는 ‘생명 대 생명’의 불가피한 상황에서만 허용되어야 한다는 성경의 본질적 기준은 명료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타락과 죄인인 서로에 대한 긍휼과 사랑을 명령하고 있다는 점 또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낙태를 시술 받은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기분이 좋아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이 아니다. 여러 가지 사회적 조건에 대한 절망과 고통으로 인한 무력감 속에서 그런 선택을 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교회는 예언자적 사명 속에서 낙태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죄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말해야 하지만, 동시에 의인의 자리에서 타자로서의 죄인을 정죄하는 태도가 아니라 같은 죄인의 자리에서 무한한 긍휼과 사랑이 배어 있는 태도로 그 사실을 말해야 한다. 이때의 긍휼과 사랑이란 단순한 진리 선포만이 아니라 곤경에 빠져 낙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실제적으로 돕는 것과 차별적인 사회적 조건을 개혁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포함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인이 다원적 사회에서 낙태 문제를 바라보고 이를 사회적이고 법적인 차원에서 개선해 나가려고 할 때 절대로 폭력적인 방식을 취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폭력적인 방식이란, 기독교의 절대적 규범을 사회적인 설득의 과정 없이 정치적 권력을 통해 강제적 입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태도를 말한다.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신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구원하시고 변화시키실 때 강제가 아닌 인격적 설득의 과정을 거치신다.
또, 하나님은 교회에게 국가적 권력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낙태 문제에 대한 사회적 개선을 추구할 때는 시민으로서 허락된 자리에서 설득력 있는 논리와 대안을 마련하여 다원적 상황 속에 있는 사회 일반을 향해 인격적이고 논리적인 설득을 먼저 시도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따른 사회적 합의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정도만큼 개혁 또한 가능한 것이다.
글/이주일
히브리학, 철학,사학을 전공했고 현재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인권과 근대성, 그리고 탈근대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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