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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떠넘겨진 살인, '사형'


사형제 위헌법률심판에서 헌법재판소는 합헌이라고 판결을 내렸다. 사형제를 없애고자 애를 썼던 사람들은 안타까움에 비판을 하였고, 사형제가 있어야 한다는 사람들은 손뼉을 치며 목소리를 높인다. 사는 게 바빠 살갗에 팍 와 닿지 않는 사형제란 제도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게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도대체 사형제를 두고 왜 이렇게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일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곳이 사회다. 그 속엔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다. 따라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사회 규범과 함부로 남을 해치지 못하도록 막는 장치가 마련되었는데, 그것이 곧 법이다. 법은 여러 사람이 어울려 살 때 가질 수 있는 자유와 그 한계를 밝혀 준다. 법의 지배에 따라 국가기구는 자유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에게 벌을 내리면서 사회정의와 안녕을 지키려는 것이다.

 

 

 
사형제는 사람이란 존재와 한국사회의 앞날을 가늠하는 정치철학의 문제

법의 필요성에 대해선 딴소리 낼 이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법정 최고형 사형에 대해선 사람마다 의견이 갈린다. 어떤 이들은 사형제도가 범죄를 줄이는데 효과가 있다며 움켜쥐려 하고, 다른 이들은 법으로 저지르는 또 다른 살인일 뿐이라며 없애야 한다고 힘주어 얘기한다. 양쪽의 주장은 오랜 세월 되풀이되어 왔다. 그만큼 사형제는 사람이란 존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이며, 앞으로 사회는 어떻게 나아갈지 가늠하는 정치철학의 문제인 것이다.

사람됨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살이를 낙관한 나머지 사형제를 없애자고 사부자기 얘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이성의 존재라지만 어떠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 말이다. 모두 마더 테레사라면 좋겠지만 히틀러와 전두환도 있다. 하루에도 숱하게 벌어지는 잔혹한 범죄들을 보면서 긍휼 가득한 평온한 마음으로 범죄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많지 않을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3700년 전 조문은 사람의 욕망과 한계를 잘 담아내었다.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것도 사람이듯 자신이 당한 만큼 복수하고 싶은 욕구를 자연스럽게 갖는 것도 사람이다. 유영철이나 강호순처럼 악행을 저지른 범인을 보면 눈이 뒤집혀질 수밖에 없다. 피가 거꾸로 솟으면서 미움이 복받쳐 오르게 마련이다. 부아와 함께 자신도 지독한 짓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면 목덜미에 소름이 돋아난다. 이런 감정들이 인류 역사 내내 사형제를 이끌어 온 바탕이 된다. 이런 맥락이 있기에 잔혹한 짓을 벌인 범인들을 죽여야 한다는 논리가 힘을 얻어왔던 것이다.

더구나 사람은 이 땅에서 침 흘리고 욕구에 휘둘리며 살아가는 존재다. 욕구 때문에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걸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래서 사형제는 나쁜 짓을 했다간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로 보여줌으로써 다른 범죄를 막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사람의 속물성에 밑절미를 둔 사형찬성론자들의 주장이 솔깃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나 이러한 근거와 주장에도 불구하고 사형제를 찬성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사람에게는 더 많은 걸 탐내고, 윽박지르면 웅크리는 동물 같은 속성도 있지만 자유의지를 갖고 사랑을 실천하려는 성품도 있다. 그렇기에 잘못을 한 사람이 새로운 삶을 살 기회조차 없이 죽임을 당한다면 정의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교도소(矯導所)는 말 그대로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의 마음을 고쳐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고자 만든 곳인데, 사형은 속죄하고 거듭난 모습으로 살아갈 기회를 박탈한다. 흉악범을 죽인다고 해서 피해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피해자 가족들의 마음의 짐이 덜어지는 것도 아니다. 사형수를 처형했다는 소식이 유가족을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닐 게다. 또 다른 죽음이 생겨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사형제는 범죄를 막는데 그다지 역할을 하지 못한다. 19세기 영국 런던에서 소매치기가 들끓자 정부는 소매치기들을 공개처형했다. 트래펄가 광장에서 소매치기들이 사람들 앞에서 죽임을 당한 날, 영국 역사상 가장 많은 소매치기들이 한탕을 했다고 한다. 사람을 사형에 처해도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를 막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형제를 없앤 139개 나라들을 보더라도 사형제와 흉악범죄는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사회의 가슴 아픈 현실과 부조리한 모습

그럼에도 짐승 같은 사람들에 넌덜머리가 난 사람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그런 사람들은 죽여야 한다고 소리친다. 사형제 찬성은 이성의 판단이 아니라 어쩌면 감성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다. 사형수들은 이 사회의 쓰레기이기 때문에 치우지 않으면 범죄를 또 일으킬 거라는 증오와 두려움이 떡하니 똬리를 틀고 있기에 쉽게 설득이 되지 않는다. 이들의 주장대로 마음이 완전히 망가져 사람됨을 잃어버린 ‘괴물’들도 있는 게 사실이다. 사람을 죽인 이들 중에는 용서를 빌지 않고 사람을 더 죽이겠다고 시꺼먼 이빨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짐승’들이 있다는 말이다. 이들마저 품는 건 너무 버거울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놓치면 안 될 것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괴물’은 없다. 그들도 어렸을 때는 누구보다 환히 까르르 웃었을 것이다. 그 모습을 잃어버리고 세상을 향한 증오와 절망이 마음속에서 자라나며, 성격이 삐뚤어지고 인격, 곧 사람됨이 망가질 동안 그를 붙잡아주지 못한 우리 사회, 그들의 가족과 이웃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회복과 치유를 경험하면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강원도에서 일가족을 도끼로 몰살한 김완선이라는 애가 있었어. 처음엔 난동을 피우고 빨리 죽여 달라고 아우성이었지. 그런 김완선도 시간이 지나니까 서서히 변하더라고. 겨울에는 자기 내의를 벗어 추위를 타는 한 방 동료에게 주기도 하고 병이 나서 아픈 사람은 밤새도록 간호를 해주기도 했지. 사형 후에 김완선이 남긴 글을 봤는데 그가 얼마나 철저히 참회했는지, 그리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 괴로워했는지 그대로 드러나 있더라고. 그를 죽이는 대신 평생 감옥에서라도 참회하면서 남을 위한 삶을 살게 할 수는 없었을까."

19년 동안 교도관으로 지냈던 한 사람의 고백이다. 이 교도관은 너무 서글픈 마음에 퇴직한 뒤 사형제 폐지운동에 앞장선다. 왜? 19년 교도관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김완선'을 만났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고 믿어주는 넉넉함이 한국에 있었다면 수많은 김완선들이 죽지 않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을 거란 생각에 가슴이 아린다. 200명이 넘는 사형수의 죽음을 지켜봤던 이 교도관은 사형장에서 사라져간 사람들의 이름을 적은 쪽지를 몸에 지니고 그들을 위해서 날마다 기도를 했다고 한다.

인간이 만든 사형제는 또한 커다란 맹점과 모순을 가지고 있다. 바로, 지배 권력자의 무기로 쓰이거나 무고한 자를 박아버리는 대못처럼 쓰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형수들을 보면 악질살인범만 있던 게 아니다. 무고한 사람도 많았다. 그렇게 형장의 이슬로 억울하게 죽어간 자들에게 역사는 훗날 재심에서 무죄를 선언하기도 한다.

‘사법살인‘으로 불리며 한국사법사에서 가장 치욕스런 재판으로 알려진 인혁당 사건은 8명의 고귀한 생명을 간첩으로 내몰아 처형 후 강제 화장을 시켜버렸다. 그리고 32년이 지난 2007년, 그들 8명은 재심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6.25 당시 한강교 폭파사건으로 총살당한 최창식 대령(공병감)도 사형집행 후 14년 후에 무죄로 번복되었다. 하지만 이미 죽은 자의 생명을 다시 살려 낼 수는 없다.

사람의 생명을 박탈하고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시키는 사형제는 이처럼 맹점이 많은 형벌이다. 죽어 마땅한 전두환은 전 재산 29만원으로(!) 떵떵거리며 살아가고 그저 힘없는 사람들과 무고한 사람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은 사형제의 존치가 무의미하고 무기력하다는 증거인 것이다. 물론 과거와는 달리 정치적 사형이나 오판 가능성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겠으나, 죽이고 살리는 것이 우리 인간의 판단에 달려있을 때 우리 사회는 부조리와 억울함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숨탄것의 목숨을 끊는 건 몸서리쳐지는 참혹한 일, 누가 하라고 말할 수 있나?

그렇다면 이제 누가 사형을 언도받은 이들을 죽일 수 있는지를 따져보자. 지금까지는 교도관들이 ‘허가받은 살인자’로서 사형수들을 죽였지만 그들은 수면제 없이는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을 겪고 있다. 자신이 어떠한 일을 했는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며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자신과 상관없는 누군가를 죽이고도 멀쩡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나라의 명령이라도 할 수 없는 게 있는 것이다.

동물 죽이는 백정이 가장 낮은 천민이었을 정도로 숨탄것의 목숨을 끊는 건 몸서리쳐지는 참혹한 일이다. 동물도 그럴 진데, 사람을 죽일 때 얼마나 괴로웠을까? 1980년 말 이후, 교도관들의 죄의식을 덜어주고자 버튼을 3개로 늘려주었지만 죄책감만 세 곱절로 늘려준 셈이다. 사형집행수당으로 7만원을 받아 소주를 몸속에 들이부으며 죽음의 기억을 잊고자 하나 몸에 밴 ‘살인의 냄새’는 지워지지 않는다.

떠넘겨진 ‘살인’을 하다가 무너지는 교도관들을 보면 가슴이 저민다. 민주시민이라면 원치 않아도 누군가를 자꾸 죽여야 했던 그들의 괴로움을 헤아려야 한다. 진정 사형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직접 사형수를 죽이겠다고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뒤에서 분노만 퍼붓지 말고 사형수 목숨을 누가 끊을지 곰곰이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사형제 합헌 결정을 내린 하루 전날,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사형제 폐지를 위한 세계위원회' 회의가 유엔과 유럽 국가들의 주도로 진행됐다. 참가국들은 각종 연구 결과를 봐도, 중범죄를 줄이고 사회를 안정화 시키는데 사형이 형벌로써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무고한 사람을 사형에 처하는 경우도 빈번하게 발생한다고 주장하며 사형제 폐지의 명분이 분명함을 강조했다. 그리고 오는 2015년을 지구촌에서 사형제도가 완전한 폐지되는 원년으로 삼고 유엔 결의안 채택도 추진하기로 했다.

아직 우리 사회는 그들이 설득해 나가야할 사형제도 존치국이다. 비록 12년간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 국제 앰네스티에 의해 ‘실질적 사형 폐지국’으로 분류돼 있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세계 197개 나라 가운데 139개 나라가 사형제를 없앴다고 한국도 덩달아 등 떠밀려 없애는 것은 멋쩍은 일일게다. 제도와 법률이 선진화되지 않고, 사회의식이 갖춰지지 않은 채 억지로 끌려가면 오히려 반동이 오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시민들 하나하나가 깨어나 사형 제도를 고민했으면 하는 이유다.

글/이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