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복판에서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포기할 수 없는 꿈

집념과노력 2010. 3. 18. 18:22

사슴보다 예쁜 눈을 가진 사내가 여고생을 돌로 쳐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어둑한 밤, 술에 취한 사내는 앞에 가던 여고생에게 말을 건넨다. “오빠랑 술 한 잔 할래?” 학생이 대답이 없자 다시 묻는다. “남자랑은 싫은가? 남자가 싫으니?” 학생이 가던 길을 멈춘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는 대신 허름한 폐허 옆으로 난 좁은 골목으로 몸을 숨긴다. 골목을 등지고 제 길을 가던 소심한 사내의 등 뒤로 분노에 찬 돌덩이가 떨어지고 이내 칼 같은 목소리가 꽂힌다. “야, 너 나 알아? 난 남자가 싫어. 그러니까 말 함부로 하지 마! 이 바보 같은 새끼야.”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학생의 당돌한 음성에 잔뜩 얼어 있던 사내는 바보라는 말을 듣자 자기 앞에 떨어진 돌덩이를 들어 학생에게 되던진다. 돌에 머리를 맞아 죽은 학생은 온 동네가 다 볼 수 있는 폐허 옥상에 마치 빨래처럼 널린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 사건은 봉준호의 영화<마더>안에서 벌어졌다. 이 장면만 따로 떼어보면 구도가 매우 간단한다. 술에 취한 소심한 사내가 집에 가는 여학생에게 (악의 없이) 치근거리다 그 학생이 내뱉은 반말 욕지거리에 화가 나 돌덩이를 집어 던졌는데, 학생이 그만 죽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사건이든 완벽하게 독립적으로 볼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일반적으로 결과에는 발단과 배경이 있게 마련이다. 거짓으로 얼룩진 죄악의 구조적 연대가 배후에 깔려 있기도 하고, 상처를 남긴 기억의 편린들이 유기적 복합체를 이루어 참담한 결과를 빚어내기도 한다. 영화 전반에 걸쳐 얼키설키 엮여있는 속사정을 알면 그렇게 쉽게 수사를 종결짓기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사슴보다 예쁜 눈의 소심한 살인자는 누구에게나 바보로 불리는 도준이다. 그는 극심한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엄마의 결단으로 박카스 병에 담긴 농약을 마시고 지능이 저하된다. 5살 때의 일이다. “무시하면 작살내고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리라”는 것을 구호처럼 외우고 교육받았던 터라 바보란 말만 들으면 상대가 누구이건 덤벼든다. 죽은 여학생 아정이의 처지는 어땠는가? 엄마는 먼저 저 세상으로 갔고 아빠는 다른 여자랑 바람이 나서 집을 떠났다. 치매에 걸려 막걸리 밖에 모르는 할머니만 남긴 채. 아정이는 할머니의 보호자가 되었다. 쌀을 주고 아정이의 몸을 사는 발정 난 사내들이 주변에 가득했기에 아정에게 남자는 더럽고 추하고 지겹다. 남들과 다른 자기 상황에 눌려있고 지쳐있는 그 둘이 서로에게 던진 말은 공교롭게도 마음속에 늘 똬리를 틀고 앉아 자신을 괴롭히던 말이었다. - “난 바보가 아니다.” “난 남자가 싫다."- 창문이 깨진 채 방치된 허름한 폐허 앞에서 세상에 외면당한 그들은 말과 돌덩이로 서로를 죽였다.


 

 

 
▲창문이 깨진 채 방치된 허름한 폐허 앞에서 세상에 외면당한 그들은 말과 돌덩이로 서로를 죽였다.  /영화<마더>의 한 장면


부산 여중생 납치살해 피의자 김길태에 대한 수사가 마무리되었다. 길에서 태어났다 하여 길태로 이름 지어진 그는 교회 앞에 버려져 아들이 없었던 종손 집에 입양되어 자랐다. 한참 예민한 시기에 자기가 버려져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고, 달라진 그의 태도 때문에 학교에서는 왕따가 되어갔다. 가정과 학교 안에서의 문제를 소상히 알 수는 없으나 예상컨대 안으로 울 수밖에 없는 상황과 비수같이 꽂히는 아픈 말들이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적어도 따뜻한 시선보다는.

참혹한 사건 소식을 접하면 온 나라가 슬픔과 분노에 젖는다. 당장 내 집안에 닥친 일은 아니지만 닥칠지도 모를 일이기에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법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는다.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현재 집행되지 않고 있는 사형수들을 모두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귀남 법무부 장관은 흉악범들을 수용한 청송교도소를 찾아 사형집행시설을 새로 설치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야 흉악범죄가 예방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적 통쾌함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범죄원인을 근원적으로 차단하지는 못한다. (사실 사형집행으로 범죄예방을 하려면 집행 후 보도보다는 TV 생중계라도 해야 예방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전자발찌를 법 시행 전까지 소급해 적용한다든지 특별법을 강화하는 것도 문제 해결의 능사는 아니다. (발찌를 끊어버리고 범행을 저지르는 일도 있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흉악 범죄가 배태되는 사회의 구조적 원인을 찾아 제거하는 일이다. 이른바 흉악범의 상태를 분석하면 대부분이 반사회적 성격장애를 겪고 있거나 심리적 공황가운데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가 노력해야 할 것은 (소를 잃어버릴 때마다 외양간을 고치는 격인) 제어장치의 강화보다는 반사회적, 심리적 장애가 생기는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 근원적 배경, 무엇일까? 가난이다. 아니, 가난한 자들을 대하는 이 사회의 병들어 버린 시선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도 모르게 병든 시선은 가난에 처한 사람의 마음에 상처와 앙금을 남긴다. 도준이가 바보가 된 것도 아정이가 남자를 지겨워하는 것도, 그리고 길태가 길바닥에 버려진 것도 모두 가족의 해체와 극심한 생활고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마음 속 앙금은 현실적 배경이 남기는 것이 아니다. 배경에 따라 사람을 다르게 대하는 차별적 태도와 시선이 남긴다. 견딜 수 없는 시선과 반복되는 스트레스 속에서 반사회적 성격장애와 공황장애가 발생하는 것이다.

가난이 극심한 한 초등학생이 있다. 고작 12살이다. 아빠는 없다. 학교 관계자가 아이를 앞에 세우고 거칠게 말한다. “집에 가서 급식비를 받아 오지 않으면 더 이상 밥은 없다.”  어린 초등학생은 그 앞에서 어쩔줄 몰라한다. 사교육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하는 중학교 3학년 학생에게 “너는 학원도 안다니냐? 학교 평균 깎아 먹지 말고 다른 학교로 전학가라”고 교장선생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도 한다. 이런 어려움과 무시를 딛고 훌륭한 사람으로 보란 듯이 성장하라고 격려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남자가 싫은’ 아정이와 ‘바보같은 새끼’ 도준이의 사건처럼, 훗날 대사회적 묻지마 살인을 일으킬 수 있는 아픈 말을 애초에 삼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어떠한 말이라도 건강하게 이겨내는 학생도 있겠지만, 그 아이의 처지에 따라서는 마음 속 응어리로 자리잡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되기도 한다.

부의 집중과 절대빈곤이 구조적으로 대물림 되고, 보편적 국민복지는 안중에도 없이 자연환경을 파괴하는데 국민의 혈세를 퍼붓는 현실, 무한경쟁과 사교육을 부추기고 있는 병든 이 사회는 그 자체가 흉악범죄를 키우는 인큐베이터다. 흉악범죄에 대한 처벌규정과 예방대책을 강구해야겠지만,  해결책은 좀 더 근본적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시민교양과 인성교육'이 먼저 아닐까? 처음부터 끝까지 '가치의 중심인 사람'을 향해 온유와 존중의 마음을 견지하기만 해도 흉악범죄가 배태되는 일은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문익환 목사의 시 <꿈을 비는 마음>을 떠올리며, 모든 것이 그 가치 그대로 보이는 세상을 꿈꿔본다.

벗들이여!
이런 꿈은 어떻겠소?..............


그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다보면
사팔뜨기가 된 우리의 눈들이 제대로 돌아
산이 산으로, 내가 내로, 하늘이 하늘로,
나무가 나무로, 새가 새로, 짐승이 짐승으로..

사람이 사람으로 제대로 보이는
어처구니 없는 꿈 말이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