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죄(定罪)와 면죄(免罪)
작년 박연차 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부도덕한 죄인으로 몰아가기 위해 검찰은 피의사실을 사전 공표했다. 기소 전에 피의사실을 공표한 것이기에 형법 126조에 의하면 죄에 해당한다.
그러나 검찰은 피의사실 공표 죄로 고발된 이인규 전 중수부장과 수사팀을 불기소 처분했다. 위법성 조각사유(형식적으로는 범죄 행위나 불법 행위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도 실질적으로는 위법이 아니라고 인정할 만한 특별한 사유-편집자 주)가 있었다는 것인데, 그 사유는 다름 아닌 ‘공공의 이익‘을 위했기 때문이랬다.
죄 정하기:꼬투리 하나면 충분하다
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매우 간단하다. 루머든 사실이든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 입소문을 내면 된다. ‘들어서 알고 있는 사람’ 몇을 확보하면 일단 죄를 정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인간이 범하는 죄 중에 가장 쉽고 빠르고 통쾌한 것이 ‘정죄’다.
정치검찰이 무언가를 의도하고 피의사실을 흘려주면 그 때부터 족벌언론은 받아쓰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때로부터 여론은 형성된다. 형성된 여론은 부자의 친구를 서민을 위한 구원자로 둔갑시키기도 하고, 털어서 먼지 조금 난 사람을 몹쓸 파렴치한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려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있다. 그것이 동네 아낙네들 이간질이든 언론 플레이든 사람의 혀에서 시작된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다. 꼬투리 하나로 다른 사람들을 흥분시키면 된다. 당을 짓고 편을 만들어 궁지로 몰아버리면 그만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엉이 바위로 올라갈지는 아무도 몰랐겠지만, 얼마 전 한명숙 전 총리도 같은 방법으로 피의사실을 공표하고 이른바 ‘죽이기’를 되풀이 하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 죽어도 상관없다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는 것은 오직 인간의 머리에서만 나올 수 있는 전략이다. 인간의 타락 이래 나온 이 무서운 전략은 혀에서 실행되고 여론몰이로 완성된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를 ‘죽여야 할 죄인’ 만들 때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 입장에서는 안타깝게도 처음엔 뜻대로 풀리질 않았다. 예수를 죽일 자로 정하기 위해 온 공회가 난리를 쳤지만 상황은 오히려 난감해져만 갔다. 거짓 증언들이다보니 서로 일치하지 않았던 데다 예수는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때 대제사장이 답답했는지 몸소 자리에 일어나 질의를 시작한다.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줄곧 잠잠하셨던 예수께서 이 대목에서는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하다.” 그랬더니 대제사장이 값비싼 옷까지 찢어가며 광분했다. 체포된 예수의 입에서 신성모독적인 발언이 나온 것이다. 탁월한 유도심문이다.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서로 화답한다. “들었지? 더 이상 아무런 증거가 필요 없다. 어떻게 생각해?” “당연히 사형감이다” 죄를 정하는 데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꼬투리 하나면 충분하다. (막14:63,64)
죄 면하기: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정죄는 강자도 약자도 다 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도 부유한 사람도 누구나 다른 이를 비난하고 정죄할 수 있다. 그러나 죄를 면하는 것은 상황이 다르다. 면죄부를 발행할 수 있는 두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하나는 권력이고 다른 하나는 면죄부를 발행한 이유를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다.
얼마 전 이건희 전 회장을 사면한 보좌 권력이 ‘국가적 관점’에서 ‘국가의 이익’을 고려한 것이라고 면죄부 발행 사유를 설명한 것처럼, 검찰 권력은 피의사실 공표를 한 건 사실이지만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죄가 안 된다고 공식 발표했다. 면죄부를 발행할 수 있는 위의 두 가지 요건을 다 갖추었으니 가능한 일이다.
정죄와 면죄의 주권자
강한 자들의 횡포로 가득한 세상 속에도 위로는 있다. 사람이 어떤 이의 죄를 정하여 하나님께 끌고 가도 하 나님은 그 정죄를 수용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반대로 나는 무죄하다며 손 씻고 스스로 자유하거나, 자기들끼리 면죄부를 주거니 받거니 해도 하나님은 그들을 죄 없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돈과 권력에 의해 정죄와 면죄가 남발되는 서글픈 현실 속에서, 정죄와 면죄의 주권자이신 공의의 하나님을 바라봐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